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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독학 정보

기타를 글로 배웠어요 5

켄지 0 1361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 시절까지 나는 컴퓨터 덕후였다. 중학교 시절 컴퓨터는 정말 비쌌기 때문에 사촌동생 네 집에 놀러 가거나 친구네 집에 놀러 다녔다. 컴퓨터가 없는데도 디스켓을 사기도 했으며 컴퓨터 잡지도 많이 보면서 컴퓨터와 관련된 잡지식들을 끌어모았다. 제대로 이해하는 건 별로 없었다. 컴퓨터 잡지를 신나게 읽고 있었던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나는 굉장히 저렴하게 나온 컴퓨터를 보고 어머니께 사달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학교에 붓던 농협 적금을 깨서 그 컴퓨터를 사주셨다.     


  나는 컴퓨터 음악을 하려고 했다. 문제는 컴퓨터만 있고 미디 장비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게임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는 공부, 통기타, 드럼, 베이스 기타, 컴퓨터 중에서 무얼 더 많이 했는지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오히려 통기타는 소홀했고 드럼과 베이스 기타에 더 집중했으며 컴퓨터에 올인을 했다. 이름 모를 되게 허접한 사운드 카드가 하나 들어 있었고 도스 시절의 컴퓨터였기 때문에 이걸로 뭔가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몰랐다. FM 음원으로 음악을 만드는 도스용 시퀀싱 프로그램을 하나 찾아서 그걸로 음악을 만들어보게 되었다. 그 당시 음악 파일은 플레이하는 파일과 FM 음원이 담긴 뱅크 파일이 따로 있었고 뱅크 파일을 바꿔서 연결해 주면 소리가 아주 조금 더 좋아진다거나 달라진다거나 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플레이 음악은 그대로인데 음원 순서가 다른 뱅크를 연결하면 음악이 이상하게 플레이되기도 했다. 그렇게 처음 만들었던 음악이 오 나의 여신님 애니메이션곡이었는데 셔플 리듬의 경쾌한 곡이었다. 문제는 FM 음원으로 만드는 시퀀싱 프로그램에는 셔플을 구현할 방법이 없었다는 점이다. 기타로는 매일 신나게 칠 수 있는 리듬이었는데 시퀀싱 프로그램 위에 리듬을 올려야 할 상황이 되자 1/4로 리듬을 찍고 있었다. 플레이 해보면 원곡과는 다르게 리듬이 심각하게 이상한데 구현할 방법을 잘 몰라서 하이햇을 미세하게 조정해 보다가 1/3 지점에서 괜찮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실제 셔플의 구조도 셋 잇단음표가 기본이기 때문에 멋모르고 정답을 맞춘 상황이 되었다. 전주와 1절, 후렴까지 만들고 대충 복붙해서 음악 하나를 만들었다. 한 달 가량 걸렸을까. 학교에 늘 컴퓨터 얘기하는 친구에게 FM 음원으로 만든 음악을 녹음해서 들려줬다. 그 친구는 되게 잘 만들었다며 미디로도 만들어 보라고 했다. 이어 '옥소리'라는 놀라운 물건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옥소리는 한국에서 제작된 사운드카드인데 무엇보다 미디 호환이 아주 잘 되어 나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케이크워크로 미디를 공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저렴했다. 사실 진짜 사고 싶었던 것은 롤랜드의 사운드 캔버스였지만 그것은 컴퓨터만큼이나 가격이 비쌌다. 나는 어느 정도 시간이 더 흐른 후 용돈을 모아 옥소리라는 사운드카드를 구매했다. 나는 옥소리를 찾아 용산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가격을 비교해 보았고, 좋은 가격으로 컴퓨터 케이스에 가득 차는 거대한 사운드 카드를 구매해올 수 있었다. 내가 만들어 놓았던 FM 음원의 노래를 틀어보았다. 우오오! 기존과 하나도 다르지가 않았다. 음원이 파일로 되어 있으니 출력되는 사운드가 달라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잠시 상심을 했지만 PC 통신에서 mid 파일을 받아 플레이 해보았다. 받았던 곡 중에는 월트디즈니의 시그널 송을 재즈로 편곡한 곡이 있었는데 나는 그 피아노 곡을 플레이 하고는 감동에 빠져버렸다. 이게 미디구나.    


  때마침 윈도 95가 등장을 했고 케이크워크 3.0을 구해 나는 본격적으로 음악 카피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평소 좋아하던 노래를 듣고 마우스로 하나하나 찍어서 음악을 만들었다. 입력하는 장비도 없었고 신디사이저도 없었으므로 마우스로 찍어야 했다. 화면에 피아노 롤을 펼쳐놓고 음의 길이와 멜로디를 귀로 들었던 것을 기억해 내며 하나하나 입력했다. 평소 듣던 음악을 악기별로 하나씩 뜯어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미디로 카피를 하려면 모든 악기를 들을 수 있어야 했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나오고 사라지는지도 파악해야 했다. 한 곡을 수백 번 들으면서 뮤트 된 일렉기타 사운드가 어디까지 나오는지 체크하고 브라스 소리가 어떤 대목에서부터 서서히 등장하는지, 어떻게 절정으로 치닫는지도 알게 됐고 드럼은 후렴에서 라이드 심벌을 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악기를 분리해서 듣고 시퀀싱 프로그램에 옮겨 카피하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재미가 있어서 이렇게 카피했던 곡이 수십 곡이 되었다. 카피는 음악의 폭을 넓혀줬고 다뤄본 적 없는 악기의 이해를 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이것은 대학 내내 이어졌고 전공도 하지 않은 교회음악과 컴퓨터음악 수업을 듣는 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그 다음은?'     


  돌아보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무언가를 한 적은 없었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미디로 음악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기고 사랑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걸로 뭘 할 것인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작곡도 악기도 계속 하다보면 뭐가 되긴 하겠지라는 환상이 있었을 뿐 구체적인 도약을 위한 노력이나 깊이는 없었다. 거기까지 들어갈 방법을 몰랐던 걸 수도 있고 진지한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던 것도 있을 듯하다. 삶의 전체가 이런 식이었다. 과정에서 좋은 경험을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좋게 해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내면적인 성과일 수 있어도 미래를 결정지을 수준까지 갈 수는 없었다.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더 나은 무엇이 될 수 있다는 환상 속에 빠져 있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환상을 깨보니 미숙함만이 남았다. 베이스 기타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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